2007/06/15 18:13

술 권하는 사회에서 '술' 즐기기

내가 언제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는지 대충 기억을 더듬어 보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니면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누나와 함께 동네 양조장으로 막걸리를 한 주전자 받아오다가 오늘 길에 장난삼아 주전자에 입 대고 누나와 함께 한 모금씩 먹었던 기억이 난다. 도착해서 할머니가 막걸리에 사이다와 설탕을 타주셔서 또 한 사발 맛있게 먹고...

술에 대해서 전혀 금기시하지 않는 집안에서 자란 터라 술에 대해서는 호기심도 거부감도 없었다. 제사 때나 명절 때면 음독하라시면서 제사나 차례 때 쓰던 술을 한 사발씩 마시게 해주셨고, 집에서 모임이 있을 경우도 장난스레 아버지나 손님들이 권하는 술을 한 두잔 마셨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처음 술에 취한 날은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학교 근처 공터에 야시장이 들어 섯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야바위 아저씨의 현란한 손재주도 볼 겸 놀러 간 적이 있다. 시장을 대충 한 바퀴 돌고 임시로 친 천막에 차려진 파전집에 들어가 파전 안주에 막걸리를 먹었다. 주량에 대한 개념이 없던 때라 주면 주는 대로 땡기면 땡기는 대로 마셔댔나 보다.

술이 너무 취해 몸도 못가눌 정도가 되서 집에 들어와 화장실 변기를 부여 잡고 먹은 걸 다 토해 내던 중 분명이 씹어서 먹었던 것 같은 파전 속의 파가 다시 합체되어 거의 가운데 손가락 만한 크기의 파 조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경험을 했던 적이있다. 그렇게 마시기 시작한 술은 대학교 1학년 때 정점을 이루어 일주일에 두세번 이상은 꼭 맛이 갈 정도까지 마셔댔다.

술과 담배에 찌든 몸으로 군대를 갈 때 혹시 몸이 많이 약해 훈련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20대 초반의 활력 넘치는 내 육체는 신병훈련을 마치 보이스카웃 캠핑 온 듯한 기분으로 마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후 술과 함께 해온 생활이 어언...
나름대로 꽤 오랫동안 술을 마시다 보니 이제는 나름대로 술을 마시는 원칙이 생긴 것 같다.
별 다른 건 없지만 정리를 해보자면..

1.
기분 나쁠 때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기분 나쁘면 체육관 가서 땀나게 운동이나 하던가 이불 뒤집어 쓰고 자빠져 자는게 최고다. 쓸데 없이 나의 나쁜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달해 줄 필요는 없지않은가? 그리고 기분 나쁠 때 마시는 술은 맛도 없다.

2.
술의 제일의 목적은 ice breaking 이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사람 처음 만났을 때 술 만한 ice breaker 는 없는 것 같다. 긴장감도 없어지고 타인에 대한 배타심을 없애준다. 술 마시면서 자기 속 마음도 털어놓게 되고 상대편이 어떤 사람이가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3.
술 먹기 전과 먹고 난 후의 인격이 틀린 사람하고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공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주정이 있는 사람하고의 술 자리는 왠만하면 피한다. 오랜 기간 동안 그러다 보니 이제는 마치 채로 걸러진 듯 내 주위에는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술 마시고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 원래 성격이 소심해서 술의 힘을 빌어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는 경우이거나 자아가 희박하여 술 먹고 실수하는 자신을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쉽게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경우든 주정은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 주사가 있다고 생각되면 술은 먹지 않으면 된다. 당당하게 술 안먹는다고 하면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 없을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인정.

4.
술자리에서 술을 권하지 않는다.
술은 마시고 싶을 때 마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만큼 먹었으니 너도 이만큼 먹어라 식의 태도는 좆.치.않.다. 상대방의 잔이 빈 것을 내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 따라준다. 남이 따라 주지 않아도 내 잔이 비어 있고 내가 마시고 싶으면 내가 따라 마신다. 자작하면 이쁜 마누라를 얻는다고 그래서 그러는 건 아니다.

대충 정리하자면 술은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널널하게 마시고 취하면 집에 가서 자자 뭐 그런 이야기다. 이상의 원칙은 특정 경우나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어른과 술 마실 때는 그 분의 술잔이 비어있나 항상 감.시.해야 하고, 여럿이 어울려 왁자지껄하게 술 마실 때는 술 잔도 서로 권하고 받으면서 떠들석하게 마시는 것도 좋아 한다. 혹시 접대할 일이 있으면 폭탄주도 만들어 돌려주고 해야겠지... 괴로운 일 있을 때 귀찮아하는 친구 놈 불려내 괴롭힌 적도 부지기수다.

그냥 설렁설렁 마실 때 이야기다.

"술 권하는 사회"에 나름 일조를 하고는 있지만 머 그렇게 강권하는 편은 아니니... 다만 술 안먹는 사람과 별로 안 친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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